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문단 편집) === 국제 사회 === 이 테러로 인해 [[미국]]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 규탄 성명을 발표하였고, 미얀마 외에도 [[코스타리카]]·[[코모로]]·[[사모아|서사모아]] 등 여러 나라가 단교했다. 그 외에 호주, 뉴질랜드, 브루나이, 필리핀, 도미니카, 프랑스, 네덜란드, 서독, 오만, 아랍에미리트 등 서유럽과 중동, 동아시아, 아메리카의 10여개 국가가 북한을 향후 절대로 수교할 수 없는 나라로 선포하면서 북한의 대서방 외교는 치명타를 입게 된다. 물론 오만은 나중에 이를 번복하고 1992년 북한과 수교를 맺었다. 일본 역시 독자적 대북 제재를 추진하였다. 한편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4/03/25/0503000000AKR20140325182300043.HTML|2014년에 공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북한을 응징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군사정권 시절이었으니 군부에선 "북한에 보복을 해야 한다"고 분노했다. 일명 벌초 작전으로, 평양에 특수부대가 상륙하여 김일성을 사살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이 이를 막고 무력사태로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제3세계의 남북한 외교전이 아웅 산 테러로 인하여 북한의 패배로 끝났다는 주장은 섣부른 것아다. 소련이 1983년 9월 2일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느라 북한의 편을 들었으며, 중국 역시 애매한 중립론을 내세우며 북한을 두둔했기 때문에 동구권과 소련의 눈치를 보는 3세계 국가들은 북한 비난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련은 아웅산 테러 이후 김일성을 [[모스크바]]에 23년 만에 초청하였고, 김일성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가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소련 장교 노비첸코를 만나는 쇼까지 벌이면서 북소 우호 관계를 과시했다. 1980년대에 북한과 동유럽, 소련과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어 북한은 재일교포 자본을 털어서 기반한 역량을 바탕으로 상당한 양의 대소 경공업 수출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중국도 북소 밀월에 긴장하여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달리 [[후야오방]] 총서기가 청진항을 방문하는 등 북한에 여러 당근을 제시하였고 북중 경협도 진전되었다. 즉 미국처럼 북한도 대응 가능한 리스크로 넣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외교적으로 소련과 중국이 나설 수 밖에 없어서 북한이 반사이익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막장 행위는 분명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았고, 북한은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비상식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국가로 인식되어 제3세계 국가들이 북한과의 외교를 신중히 생각하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이 믿을 수 없는 국가로 낙인되어 북한의 외교적 고립, 특히 냉전 이후의 고립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60여 국가가 북한과의 수교를 줄이거나 끊고, 3개국은 아예 외교 관계를 단절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3급 비밀 작전명, "늑대사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